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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일기

서울역 그녀, 우리의 친절은 어디서 오는가?

posted Jan 12, 2019

2018년 겨울, 12월에 접어들며 날이 점점 추워지고 한파 예보까지 나왔다. 0도의 문턱에서 오르락내리락하던 기온이 영하 10도로 급강하한다고 알리고 있다.

아마 한 달 전쯤이었다. 11월 초순 겨울의 초입에 며칠 사이 기온보다 더 내려간다고 그날도 추위가 예보되었다. 1년 가야 한 번 만날까 하는 친구를 만나러 오랜만에 저녁에 서울 나들이를 하였다. 한 시간쯤 전철을 타고 서울역에 내려, 어두워진 밤 공기가 예보처럼 차갑게 몸을 눌러댔다. 찬 기운이 가득한 공기는 단단히 차비를 했는데도 젤리 속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친구와는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날이 추우니 밖으로 나가지 말고 지하에서 만나서 가기로 했다. 서울역은 꽤 오래 전부터 노숙인들의 의지할 곳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몇 해전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새벽에 도착한 서울역 지하보도에서 군대 내무실처럼 노숙인들이 줄지어 몸을 누인 모습을 본적이 있다. 한 달 전 그날도 날이 어두워지면서 노숙인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이 몸을 의탁한 곳의 지상은 고층 건물들과 화려한 불빛, 맛난 음식점, 멋진 옷집들로 가득한 거리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지상으로 나가기 전 지하에서 그들과 더불어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였다. 사람들이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 멈춰 서 있으니 보인다. 그때 바쁘게 움직이는 인파의 흐름 속에서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눈에 띈 것은 그 사람의 행동 때문이었고, 그 행동이 인파의 흐름보다 느리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그러니까 그녀의 뒷모습만 보았기 때문에 나이는 가늠할 수 없었으나 입성과 몸놀림으로 보아 30대 초반쯤으로 여겨졌다. 지금껏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그 여인의 행동은 최근에 책을 편집하면서 보았던 어느 장면이 떠올랐다.

일찌감치 추위를 피해 지하에 내려와 두툼한 종이상자를 깔고 누운 노숙인은 초저녁부터 잠을 자고 있었고, 그의 머리맡에는 다 비운 막걸리 병이 세워져 있었다. 아마도 빈 병에 있던 막걸리는 그가 마셨을 것이고, 이 밤을 견뎌내기 위해 의지했을 것이다.
나의 눈에 띄었던 그녀의 행동은 그 노숙인에 대한 어떤 행동이다. 그녀는 몸을 숙여 그의 손을 잡더니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었다. 그러고는 "따뜻한 밥 잡수세요."라고 말하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갈 길을 갔다. 내가 섰던 곳과 불과 몇 걸음 안 되었으니 그녀의 그 따뜻한 말이 명확하게 들렸다. 노숙인은 누운 채로 무슨 일인가 하고 둘러보고는, 누가 주고 간지도 모른 채로 손에 든 만 원짜리 한 장을 흘긋 보더니 다시 몸을 웅크리고 잠에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떠올랐던, 편집하던 책의 페이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2012년 11월 14일에 타임스 스퀘어에 있던 한 관광객은 어느 경찰관이 무릎을 꿇고 맨발인 노숙자에게 새 신발을 신겨주는 사진을 몰래 찍었다. 그 사진을 뉴욕경찰국(NYPD) 페이스북에 올리자 바이러스처럼 퍼졌다. 로렌스 데프리모라는 그 경찰관은 맨발인 남자의 고통에 마음이 움직여서 근처 신발 가게로 불쑥 들어가 자기 돈으로 신발을 사 주었다. 그는 그 일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굉장히 추웠고 그 남자의 발에 발진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뉴욕경찰국에게는 엄청난 홍보 효과가 있었지만, 사진의 매력은 그 경찰관의 자발적인 행동(행동의 자발성)과 누군가가 그것을 사진으로 찍은 우연한 일이었다. 로렌스 데프리모가 사진 찍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인기를 노리면서 카메라를 향해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고 상상해 보라. 그렇다면, 그의 행동은 자발적 동정보다는 명예욕으로 동기화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게되면 외관상 마음이 푸근해지는 친절의 행동은 즉시 끔찍하고 졸렬한 모조품으로 변형되고 만다. 물질적으로는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겠지만, 바로 그 행동 자체는 마술처럼 변할 것이다. 그 경찰관은 여전히 75달러를 썼고, 그 노숙자는 여전히 전에 가져보지 못한 좋은 신발을 얻었다. 우리는 올바른 동기 없이 행해지는 '동정심이 있는' 행동은 그저 꾸민 것에 지나지 않고 덕의 모조품이라는 강력하고 뿌리 깊은 직관을 가지고 있다. 다른 면은 도덕적 영역에서 진정성과 자발성의 증거가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감동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발성(spontaneity)"이라는 용어가 보인다. 로렌스 데프리모의 친절한 행동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의도한 행동이 아니라 바로 "자발성"에서 나온 행동이다. 누군가에게 잘보이려는 행동은, 굳이 말하자면 "애쓰는 행동"이다. 이 책에서는 그것이 "차가운 인지"에서 나오는 행동이라고 말한다. 로렌스 데프리모의 행동은 "애쓰지 않은 행동"으로서 "뜨거운 인지"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날 내가 서울역 지하에서 본 그녀의 모습도 로렌스 데프리모의 친절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행동은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화두처럼 남았다. "점화효과"라는 말이 있는데, 그녀의 행동이 나로 하여금 점화하였다.
그리고, 더불어 한 가지 덧붙이자면 카드와 휴대전화로 현금을 대신하는 요즈음 지갑에 만 원짜리 몇 장이라도 가지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비상금으로, 그러니까 내가 급할 때 쓸 비상금이 아니라 나도 누군가에게 베풀 준비를 해 두자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은 "애쓰는 행동"일 수도 있겠다 싶다. 애쓰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나로 다듬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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